에밀리아 페레즈 (Emilia Pérez) – 폭력과 구원의 변주, 뮤지컬로 완성한 파격적 범죄 서사
작품 개관과 제작 배경
2024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심사위원상과 네 배우 공동 여우주연상이라는 이례적 2관왕을 석권한 <에밀리아 페레즈>는 프랑스 거장 자크 오디아르가 7년 만에 내놓은 신작입니다. 멕시코 카르텔 두목이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기묘한 의뢰를 계기로 폭력의 굴레를 끊고 새 삶을 모색한다는 서사를 뮤지컬·누아르·멜로로 교직해, 감독 특유의 하드보일드 정서를 전혀 다른 장르적 옷으로 갈아입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제작비 3,500만 유로 규모의 이 프로젝트는 파리·멕시코시티·세비야 올로케이션과 IMAX 1.90:1 스코프 촬영, 돌비 애트모스 7.1 믹싱까지 도입해 ‘프랑스 제작 뮤지컬의 기술적 최전선’을 제시했습니다. 2025년 3월 국내 개봉에 맞춰 메가박스 단독 4DX 상영(1주차 전체 회차 매진)·아카데미 기획전 이벤트 등 공격적 마케팅이 진행되며 예술·상업 양극단 관객층을 모두 겨냥했습니다.
줄거리와 캐릭터 구성
능력은 뛰어나지만 ‘범죄자 세탁’에 지친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는 막대한 수임료를 제안받고 멕시코 전설적 카르텔 보스 ‘마니타스 델 몬테’를 찾아갑니다. 그의 요구는 단 하나, “완벽한 신분 세탁과 전신 성전환 수술”. 긴 준비 끝에 마니타스는 트랜스 여성 ‘에밀리아 페레즈’(카를라 소피아 가스콘)로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과거 폭력과 잃어버린 가족의 상흔은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닙니다. 에밀리아는 자신이 버린 옛 아내 제시(셀레나 고메즈)와 두 아들을 비밀리에 돕고, 카르텔 피해자 미망인 에피파니아(아드리아나 파스)에게 연정을 느끼며 삶의 균열을 자각합니다. 영화는 ‘반 남자·반 여자, 반 보스·반 여왕’이라 노래하는 12분짜리 핵심 뮤지컬 넘버를 통해 정체성 혼란과 구원의 열망을 겹쳐 놓습니다. 마지막에는 에밀리아와 리타가 제도권을 거부하고 카르텔 자산을 전액 사회 환원하는 ‘인권재단’을 설립하면서 폭력의 고리를 끊으려 하지만, 남겨진 과거의 죄와 신원 노출 위협이 다시 비극적 운명을 호출합니다.
연출과 기술적 완성도
오디아르는 “연출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설계”라 밝히며 각 씬을 뮤지컬 넘버와 대칭 구조로 배치했습니다. 38곡의 오리지널 트랙을 위해 라틴 그래미 수상 작곡가 나탈리아 라푸르카데가 음악감독으로 참여, 전통 마리아치·레게톤·가스펠·힙합을 자유로이 오가는 사운드 팔레트를 완성했습니다. 칸 현지 시사 때 관객을 전율시킨 오프닝 트래킹숏(카르텔 은신처→법정→리타 사무실)은 스테디캠+드론+무인레일 3중 합성으로 4분 50초 원테이크를 구현, 캐릭터 이동 동선을 ‘범죄→법→구원’의 거대한 서사 축으로 시각화합니다. 색채 감독 니콜라 마블은 ‘폭력의 레드–구원의 터쿼이즈’ 대비를 반복해 주인공 내면의 양가성을 미장센으로 그려냈고, 인체 해체를 연상시키는 성전환 수술 신은 4K 내시경 프로브 렌즈를 활용해 장르적 충격을 극대화했습니다.
연기와 캐스팅 분석
트랜스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칸영화제 사상 첫 트랜스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기록되며 ‘폭력적 남성성→섬세한 여성성→양가적 괴리’를 한 몸에 담는 난도 높은 변주를 완수했습니다. 조 샐다나는 강단과 회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리타를 스페인어·영어·프랑스어 3개 국어로 소화, ‘누아르의 눈’이자 ‘관객 대리자’로 기능합니다. 셀레나 고메즈는 ‘스페인어 대사 어색하다’는 일부 라틴계 비판에도 “마법이 사라졌지만 후회는 없다”라며 작품을 옹호, 연기 영역 확장의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흥행 성과와 관객 반응
프랑스 개봉 첫 주 62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7주차 218만 명으로 올해 프랑스 아트버스터 1위를 기록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미키17>·<히트맨2> 공세 속에서도 개봉 5일 만에 11만 관객으로 예술영화 최고 오프닝을 달성했으며, 4DX 체험관은 전 회차 매진 사태를 빚었습니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86%, 메타크리틱 79점으로 평단 호평이 우세하지만, SNS 과거 혐오발언 논란이 흥행 롱런을 저해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사회적 메시지와 현대적 의미
영화는 ‘트랜스 여성 서사’와 ‘폭력/구원’ 신학을 뮤지컬 양식에 접목, 한 인간이 과거를 직시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기까지의 가시밭길을 전시합니다. 동시에 ‘마초 문화의 산물인 폭력성은 성별 전환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역설을 통해, 진정한 구원은 외형보다 내면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함을 설파합니다. 여우주연상 공동 수상이나 트랜스 배우 캐스팅은 영화계 다양성 논의를 재점화했지만, ‘트랜스 서사를 비극적 면죄부 장치로 쓰는 건 퇴행’이라는 비판도 병존해 작품은 진보·보수 양축 모두의 논쟁적 심장부에 서 있습니다.
결론 및 종합 평가
<에밀리아 페레즈>는 “누아르와 뮤지컬의 기묘한 결혼”이라는 평답게 장르적 파격과 사회적 문제의식을 한데 껴안은 희귀한 영화입니다. 칸 2관왕 경력과 프랑스 아카데미 시즌 핵심 후보작이라는 타이틀은 오디아르의 변신이 흥행·미학 두 마리 토끼를 잡았음을 입증합니다. 폭력과 속죄, 젠더와 정체성, 라틴 음악의 열정이 폭죽처럼 뒤섞인 135분간의 향연은 “올해 반드시 극장 사운드로 체험해야 할 뮤지컬 누아르”라는 수식에 손색이 없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트랜스 서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과감히 무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이미 한 걸음 앞선 문제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